Journal15 [Vol.13] 완벽한 무음보다 값비싼 소리의 질감 인위적인 침묵의 시대, 메종이 귓가에 남겨둔 미세한 마찰음들 이번에는 소리와 청각에 관한 이야기를 가만히 꺼내보고 싶었어요. 하루 종일 숏폼의 자극적인 배경음악과 도시의 소음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귀가 멍해지는 기분이 들곤 하죠. 그래서인지 요즘은 귀를 꽉 틀어막고 바깥세상을 차단해 주는 노이즈 캔슬링 기기들이 필수품이 되었더라고요. 그런데 버튼 하나로 주변 소리를 완전히 지워버린 그 숨 막히는 진공 상태에 머물다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기보다는 묘한 답답함이 밀려오곤 했어요. 가만히 돌이켜보면 제가 좋아하는 순간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메마른 적막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깊은 밤 모두가 잠든 방 안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낡은 시계의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 2026. 11. 5. [Special Vol.2] 모두가 프롬프트를 칠 때, 놀란 감독은 왜 거친 바다로 나갔는가 AI 시대의 스크린과 하이엔드 메종이 지켜낸 손끝의 체온 요즘은 생성형 AI에 프롬프트 몇 줄만 치면 거대한 우주나 신화 속 괴물도 몇 초 만에 뚝딱 그려내는 세상이 되었어요. 다들 효율이나 비용 절감을 이야기하면서, 영화판에서 몸을 갈아 넣는 현장의 수고로움 같은 건 이제 낡은 낭만이라고들 하더군요. 스튜디오에 편하게 앉아 녹색 스크린을 등지고 찍은 다음, 후반 작업에서 매끈한 그래픽을 덧입히는 게 훨씬 빠르고 돈도 아끼는 길이니까요. 그런데 최근 공개된 영화 〈오디세이〉 소식을 보면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스태프들이 여전히 참 지독한 길을 걷고 있구나 싶었어요. 놀란 감독은 안전한 세트장의 인공 수조를 마다하고, 35m짜리 목조선에 배우들을 태워서 스코틀랜드와 모로코의 거친 앞바다로 그냥 밀고 나.. 2026. 10. 22. [Vol.12] 완벽한 새것 대신, 낡아가는 시간을 파는 메종들 패션 위크의 소음 너머, 가죽 냄새가 짙게 배어있던 마베프(Marbeuf)의 아틀리에 파리 남성 패션 위크 주간이면, 업무상 촬영을 위해 샹젤리제 뒷골목 마베프(Marbeuf) 거리에 자리한 비스포크 워크샵을 자주 찾곤 했어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구두를 짓는 비스포크 공방이지만, 실은 그곳의 중요한 일상 중 하나가 바로 전 세계 고객들이 보내온 구두를 매만지는 수선과 리페어였습니다. 방금 상자에서 꺼낸 티 없이 맑은 쇼룸의 신제품들 틈에서, 주인의 걸음걸이에 맞춰 깊게 주름지고 손때가 묻어 본래의 색보다 짙어진 낡은 구두들이 유독 시선을 강하게 잡아끌었죠. 장인이 무릎 위에 그 구두를 얹고 묵묵히 흠집을 매만지며 솔질을 시작하는 순간, 그곳은 제품을 파는 매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흘러간 시간이 하우스의.. 2026. 10. 8. [Vol.11] 스마트폰 너머, 럭셔리가 종이의 무게를 택한 순간 초 단위로 쏟아지는 디지털 피로감 속에서, 책을 펼쳐 드는 '시간의 여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스타필드 코엑스의 별마당 도서관 한가운데 섰던 날이 생각나요. 천장까지 닿을 듯 거대하게 솟아오른 책장과 수만 권의 책들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정작 제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건 그 공간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마트폰 액정에서 잠시 눈을 떼고,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나란히 앉아있던 사람들의 모습. 쪼개진 초 단위의 자극을 벗어나, 잉크로 인쇄된 종이의 질감 속에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머물게 하는 그 풍경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어요. '아, 어쩌면 저런 멈춤과 쉼이야말로 지금 시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순도 높은 럭셔리가 아닐까.'알고리즘이 채워줄 수 없는 안목, 메종이 서점을 여는 이유최근 글.. 2026. 9. 24. [Vol.10] 미슐랭의 스티치, 메종의 미학: 패션 하우스는 왜 '입맛'을 디렉팅하는가 알고리즘이 계산할 수 없는 '미각', 그리고 공간을 지배하는 셰프의 아우라 최근 글로벌 럭셔리 하우스들이 앞다투어 파인다이닝을 내는 걸 보면서, 문득 조선팰리스 이타닉가든에 앉아있던 날이 떠올랐어요. 정갈하게 땋아 올린 플레이팅 하나, 재료의 스토리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손종원 셰프님의 감각을 마주할 때 느끼는 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거든요. 그건 잘 정돈된 하나의 아틀리에에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에 가깝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요즘 글로벌 메종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손끝의 아우라'예요. 스마트폰 화면 속 알고리즘이 아무리 화려한 화보로 우리를 유혹해도, 미슐랭 셰프가 눈앞에서 빚어내는 요리의 '온도'와 '향', 그리고 그 공간이 주는 중압감은 절대로 액정 너머로 전달될 수 없으니까요.완벽한 데이터.. 2026. 9. 10. [Vol.9] 정답을 찾는 알고리즘, 질문을 던지는 마케터 데이터가 예측할 수 없는 '나만의 확신'이 만드는 차이 파리 본사에서 전달되는 시즌 캠페인 가이드라인과 이런저런 마케팅 지표들을 마주할 때마다, 문득 뷰티 브랜드 매니저로 첫발을 내디뎠던 수년 전의 기억이 스쳐요. 뷰티 브랜드 매니저 시절, 삼성 빅스비 초창기에 가상 메이크업 협업을 밀어붙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기술은 서툴렀고 내부의 반대와 반응은 미지근했지만, 그때 뼈저리게 배운 게 하나 있어요. 기술의 빈틈을 메우고 판을 움직이는 건 결국 마케터의 무모할 정도의 직관이라는 것. AI는 수만 건의 데이터를 조합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정답'을 제안하지만, 하이엔드 럭셔리는 숫자가 감히 예측할 수 없는 파격을 창조해야 하니까요. 모두가 수치와 안전한 길을 말할 때, 1%의 확신으로 브랜드의 고유성을 .. 2026. 8. 27. 이전 1 2 3 다음